그녀 이야기

봉천동의 저녁

misfortune4 2015. 5. 23. 21:58



행복동을 옆에 둔 중앙동에서 페이우의 스커트를 입고 내 향수에 취해 걷는 나는 뜨내기처럼 느껴진다. 

저녁의 풍경이 고요하지만 시궁창같은 하수구 냄새와 초저녁부터 벌겋게 취해 아무렇게나 담배를 물고 시끄러운 가래를 뱉는

아저씨/노인들을 수시로 마주치는 일은 동네의 풍경에 대한 나의 행동을 꼴값까지는 아니어도 괜한 감상 쯤으로 느껴지게도 만든다. 


머무는 공간인 직장이나 집이 아닌 길거리를 걷고 대중교통을 타는 일은 조금 다른 층위의 세계를 겪는 기분을 준다. 집이라고 생긴 시멘트 건물에 들어서면 거리에서 불러 일으켜지던 생각의 연쇄들이 뚝 끊기고, 약간은 들뜬 채 연기하는 기분이 걷힌다. 마치 집은 무대의 뒤처럼 느껴진다. 똑발랐던 어깨가 처지고 유지되던 마음이 미세하게 요동하며 내려않는다. 사실 연기에 묻혀있던 감정이 살아나는 것이 두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집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할까. 집이란 공간에서 내일 다시 외출하기까지 어떻게 보내야만 내 일상이 유지될 수 있을까. 


배우들은 집에서 다음날의 연기를 위해 대본 리딩을 하겠지.


나는 언젠가부터 집에서 왜 이렇게 허망하게 잠들고, 일어나게 되었을까.


집에 와도 감정이 내려앉고 바닥까지 쳐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젠 집이 가까워올수록 힘들다. 

집은 이제 내게....

어떤 생각을 요하는 진중함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너무 어둡고 건조하고 무거운 무게의 실체를 대면해야 하는 곳이라서. 

그런 이유 때문에 나의 껍데기조차도 안식을 시켜줄 수 없어서, 나는 내 몸을 자꾸만 내 의식으로부터 분리시켜 내보내려 하고 있다.

그러나 내 몸은, 아직까지 이 불행을 버텨주고 있다.

나를 구성하는 것 중에 가장 선한 것은, 내 몸이다. 


몸은 대체로 선하다. 몸은 방어체계이고, 정화체계이며, 그래서 결국 회복을 향해가는 삶의 실체와 다름없다. 


내 몸을 믿어야만 한다. 살아있다는 증거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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