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야기

시에게 가까이 가고픈데.

misfortune4 2015. 5. 23. 17:22




내가 어떤 고민을 했고, 무엇을 알고 싶었고, 그래서 하나의 결론으로 무엇을 지향했는지.

일부의 기록만이 웹에 떠다니고, 

이사시 절대로 버리지 못하는 것이라는-핀잔도 비아냥도 인정도 아닌 그 무엇-말을 듣고만 천장에 가까운 영화표와 글을 실었던 어떤 무가지(정도로도 기억되지 않을) 몇장들이 남아있다가 힘없이 사라졌다. 


왜 요즘에 와

이렇게 바쁜 와중에 일을 하면서도 


내가 썼던 비문장이 즐비한 글들이 문득문득 스쳐가면서 마음 한구석을 일으키곤 하는지

그 일으킴의 느낌이 비록 가라앉을 것을 예견한 낮고 힘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주말에 일을 하러 나왔는데, 실은 교열을 보러 나왔는데

제멋대로 살아온 습관이 보이는 결과물을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이 들어 멈춘 채

텅 빈 마음을 채우려 시를 읽었다.


힘들때마다 많이 읽었던, 이제는 노년이 된 황동규 시인의 2009년의시 <겨울밤0시5분>.


6년이 지났지만, 그 시는 여전히 글씨를 눈물로 일렁이게 만든다. 

언제나 투명하게 움직이며 정화시키는 힘을 지닌 황동규의 시이미지.

매일 밤 하늘을 보았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막연함에 이르자 발생되는 행동 하나. 눈에 들어온 대상에 대한 관찰. 슬픔과 고통과 기쁨의 소통. 대리되는 감정.

그에게 확신에 찬 긍정적 세계를 열어주고 픈 의지. 그가 보는 세계의 펼쳐짐.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은 채 초월되는 작가의 시점. 

아름다운 최소한의 영화=시.


그리고 나서 내 떠다니는 글을 몇편 읽으니-이상할 정도로 2009년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간 내 고민과 치열함이 휘발된 뒤에, 어딘가 남아있는 이미지와 이동과 시간에 대한 표현=체험 욕구를

해갈할 길이 없어왔다는 것을 느낀다.


나야 말로 아무렇게나 살았다-판단력을 상실하기로 억지를 부릴 때, 그 행동결정의 양식에는 어떤 작게 구겨지고 뒤틀린 윤리하나가

고장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위의 욕구를 해갈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나는 절대로 반복하지 않으려고만 하는 반복강박증의 상태이고, 쾌락의 대상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의식적으로는 그 대상이 제공하는 쾌락의 어떤 증거도 모두 거부하는 결정=신경증의 상태였다. 그건 내가 니콜라스 레이의 bigger than life를 본 후 남긴 글에서 인용한 <영화와 모더니티>의 서문에 그렇게 앞날을 예견한 채 쓰여있었기에 지금 막 든 생각이다.



'현재를 더 수월하게 만들려고 할수록, 그것은 더 어렵게 된다. 좌절된 욕망은 현재에서 불가능한 욕망이 된다. 그것이 불가능해질수록, 더욱 신경증적으로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반복 강박증은 또한 반복하지 않으려는 강박증이며, 불가능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희망이 좌절되었던 과거 시간의 파괴적인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강박증이다. 따라서 고통스런 신경증은 쾌락의 추구로부터, 쾌락의 대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의식적으로는 그러한 대상이 제공한 어떤 쾌락의 증거도 모두 거부하는 전의식의 결정으로부터 생겨난다' (존 오르, <영화와 모더니티> p.7) 



모든 희망이 좌절되었던 과거 시간의 파괴적인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강박. 신경증의 고통. 

그 한가운데 여전히 있는 나는

고통과 신체의 한계점에 다다르자, 현재나 육체가 아닌 다른 곳에서부터(과거에 흘러넘쳤던 어떤 곳이었을까) 나의 갈증은 쾌락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신호가 온다. 하지만 나의 갈증은 쾌락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과거를 고통으로서 상기하고팠던 그 마음-쾌락을 쾌락으로서 남기지 않으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서말한 구겨지고 뒤틀린 채 오작동하는 그 무엇이 언제나 다시 꺼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앞으로도 그렇게 형성된 것을 기억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그 증거들을 아무리 지워내도, 내가 그 윤리로서 살아갔던 시간들은 내 삶을 구성하고 있다. 나는 위험한 사람이 이미 되어있다. 그것엔 과거의 고통과 사람들의 잘못과 나의 자학을 잊지 않으리라는 결의도 포함되어 있다. 누구나 위험한 사람이다. 모두가 과거에 지배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위험하게 살지는 않는다. 현재 선택하는 이미지의 결정. 행동윤리의 결정에, 기억상실에 대한 의도만이 없기를. 피해의식이나 두려움에 대해 기피하고자 하는 거짓된 행복 에너지가 아니기를. 내가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에 어떤 신경증적 강박이 작용되지 않기를. 아니 그 연결고리에 의존하지 않기를.



고통을 계속해서 남기고 축적하려는 나의 윤리가 뒤틀린것인지 어느정도 본능적인 것인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지만 내가 감당치도 못하는 것을 저질러버리고 앉아서 울고 있는 일이 얼마나 한심한 행동인지는 충분히 판단하고 있다.



시가 도피처가 될 수 없기에

하직 단 한편의 시도 쓰지 못한다.



하지만 읽는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겹쳐서 본다. 나를 시인으로서 상정하면 시인이 본 이미지는 또 다른 나의 세계에 들어와

내 삶의 형태를 드러낸다.. 마치 영화처럼.



글을 쓰고 싶었다. 

너무 간절했었던 것 같다.

매일 별을 보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매일 이젠 그만 죽어버려야지를 외치던

살기없는 눈의 여자처럼


행복하고 싶었지만 행복을 갖지 않기로 했다. 

별을 보며 막차를 기다리는 일은 행복한 일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왜 죽어버리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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