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야기

아침

misfortune4 2021. 10. 31. 09:11

아침은 정말 무서운거다.

내가 가입한 우울증카페를 보면

밤 늦게 혹은 새벽녘에 올라온 글들 중 많은 것이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이다

아침이 올까 두려운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침이 오면 나아지겠지 같은 기대가 아주 없진 않겠지

그리고 그 '나아짐'이 두려운거지

우리는 모두 병리적 현상에 기대어 살아가니까

달라지고 싶다고 느끼지만

달라지기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기에

지금의 나를 어떻게나마 조금이라도 긍정하기 위해서는

그 도리밖에 없으니

 

어젯밤 내 곁에서 뽀얀 털을 가진 4마리들이 나를 둘러싸고 쌔근쌔근 잤는데

새벽녘부터 내 발과 팔을 물고 핥고

내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며 우다다, 똥싸기, 쉬싸기, 울기, 물기등을 해댔다

휴일 새벽이면 늘 있는 일이다

출근하는 날은 내가 로보트처럼 새벽 5시엔 일어나니까 그럴 일이 없다

 

고양이들의 뇌는 마치 컴퓨터처럼 프로그래밍 되 있는 것 같다

5시인데 일어나지 않잖아

4마리의 합작으로 강제기상하기까지는

거의 한시간이 걸리지만

휴일인데 6시에 일어나는 것이 억울한 나는 최대한 버티고

그러면 손과 발에 온갖 상처가 난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고양이인마냥 울어대다가

결국 헤어볼구토나 똥싸기(냄새풍기기)를 반복해대면

나는 한계를 버티지 못하고 기상한다

아이들은 늘 나를 이긴다

귀엽지만 강력한 무기가 있고

나는 귀엽지도 않으면서 무기도 없다

 

금요일은 2년만에 전화 온 친구와 길게 통화를 했는데

걔는 나랑 통화하는 동안

자전거로 김포에서 여의도를 거쳐 잠실로 갔다

그리고는 주말에 상무와의 골프약속이 있다며

늦지 않으려고 골프장 주변의 모텔을 잡아 그 늦은 시간에 갔다

내년 승진을 목표로 했기에 걘 무슨 짓이든 할거다

주말엔 겸임교수를 하는데,

그것을 겸직하는 걸 눈감아주는 댓가이기도 하다

나는 그 아이의 금요일 저녁 일정을 그대로 느끼면서

퇴근하고 사냥감흔들고 고양이화장실치우고 밥주고 

술먹은게 전부이다

그리고 아침이 왔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토요일을 그냥 보내기에

아침이 그리 달갑지도 않았지만

그 아이는 오전부터 업무의 연장선인 골프를 치고

강의를 하러 가고

가족과 함께 저녁외식을 하겠지

 

토요일 밤엔 먹을게 없어 마트엘 갔다가 오면서 

정말 많은 가족과 친구와 연인들이 

외식을 즐기는 모습을 보았다

길거리에 혼자걷는 사람은 마치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토요일밤은 늘 외롭지만

밖을 나갔다오면 더 쓸쓸해지곤 한다

저 무리에 끼고 싶진 않지만

분명 저런 모임을 다녀오면 나는 더 공허해질테지만

내가 정말 마음에 맞는 친구 한명과 와인한잔 할 수 있는

토요일 밤이

나에게도 올까

나랑 섹스하고 집에 가는 유부남들말고

나랑 섹스 없이도 같이 밤을 보내줄 수 있는 친구

사랑말고 친구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다

잠이 들었고

읽으려고 안경과 함께 전시해둔 실내인간과 그럼무얼부르지는 표지만 열심히 보다가

그대로 

그냥 사운드클라우드에 리스트로 만들어놓은 우울한 음악 컬렉션을 듣가

잠이 들었다

 

새벽 종종 너무 쎈 우울한 소리들이 들려

음악을 끄려했으나

어떻게 끄는지 순간 기억이 나지 않아 그냥

볼륨을 줄여버리고 잠이 들었다

고양이들이

나처럼 우울해지지 않기를 바라며

 

그리고 일요일아침이 왔다

어쩌면 태양은 이렇게 정확하게 뜨고

공기는 어쩌면 이렇게 달라지는 걸까

창문을 열어젖힌 아침의 공기는

나에게 오늘은 무엇이든 해봐라고 말을 거는것만 같다

 

신이 잘한게 있다면 토마토와 포도라는 

나에게 식욕을 회복시켜주는, 유일한 식재료인 토마토와 포도

그 신맛과 단맛과 떫은 맛의 완벽한 밸런스를 가진

순수한 결정체를 만든것과

 

해와 달과 낮과 밤을 만들어주신 것이다

 

그것은 우울한 사람들에게 죽고 싶은 기분과 살고 싶은 기분을 거의 동시에 느끼게 한다

 

오늘밤에 죽기로 결심한 사람들도

단 몇시간만 참으면 살수있다는 것이

신이 설계한 날들이다

 

이것은 의사도 약도 할 수 없는 일이며

고통스러운 아침이 아닌 것은

출근을 해도 되지 않는 아침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눈을 떳다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위무하는 것이고

 

아직 살아있다는 것

내가 오늘 어제와 똑같이 절망할지라도

나는 또 살아났다는 것

내가 또 살아야만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숨을 쉬어도

괜찮다는 것

 

그것이 바로 휴일 아침의 특권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

주말에도 휴일에도 일해야하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쉬는 아침이 오겠지

 

쉬는 아침

천천히 움직여도 되는 아침

누가 등떠밀지 않고도

스스로 걷는 아침

억지로 입에 무언가를 우겨넣지 않고도 괜찮은 아침

누군가의 위로도 연락도 필요없는 아침

 

햇살만으로도 충분한 아침

 

나에게 더이상 쓰디쓴  커피가 필요없는 아침

 

온전히 자유한 내 아침

 

그 순간

아직 죽지 않은 나와

이미 죽은 자와

아니 오늘 산 나와

어제 죽은 자와

 

우리가 갈리는 극명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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