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야기

오순절 사회

misfortune4 2014. 3. 17. 13:32



...

고독한 피로 속에서 완전히 파괴된 "이원성"을 복구한다. 우리는 보고 또 보여진다. 우리는 만지고 또 만져진다.

"접근을 허락하는 피로, 만져지고 또 스스로 만질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하는 피로" ... 자아가 줄어들고 이는 세계의 증대로 나타난다.

"피로는 나의 친구였다. 나는 돌아와 있었다. 이 세상에."


한트케는 이런 "근본적인 피로"위에다 활동성을 절대화하는 경향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져버린 모든 생존과 공존의 형식을 모아들인다.

"근본적 피로"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탈진 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근본적 피로는 오히려 특별한 능력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영감을 준다. 그것은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승자가 아니라 피로한 자에게 바쳐진 핀다로스의 송가! 성령을 맞는 오순절의 사람들을 나는 언제나 피로한 모습일 거라고 상상한다.

피로의 영감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는 무엇을 내버려두어도 괜찮은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피로는 특별한 태평함. 태평한 무위의 능력을 부여한다. 그것은 모든 감각이 지쳐 빠져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피로속에서 특별한 시각이 깨어난다. 한트케는 이를 두고 "눈 밝은 피로"라고 말한다. "피로는 구조를 만들어 주었다... 평소의 혼잡함은 피로를 통해 리듬을 얻고 쾌적한 형식이 되었다".... 모든 형식은 느리다. 모든 형식은 우회이다. 효율성과 가속화의 경제학은 형식의 소멸을 가져온다. 한트케는 깊은 피로를 치유의 형식. 더 나아가서 회춘의 형식으로 승격시킨다. 피로를 통해 세계는 경이감을 되찾는다. "지친 오디세우스는 나우시카의 사랑을 얻었다. 피로는 젊음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젊었던 적은 없었다고 할 만큼, 모든 것은 피로가 가져온 평온 속에서 경이롭게 된다"


한트케는 노동하는, 움켜쥐는 손에 놀이하는 손을 맞세운다. 놀이하는 손은 결연하게 움켜쥐지 않는다. "매일 저녁 여기 리나레스에서 나는 많은 꼬마녀석들이 노곤해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 이상 탐욕도 없고 손에 움켜쥔것도 없고, 그저 놀이만 있을 뿐이었다." 깊은 피로는 정체성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사물들은 반짝이고 어른거리며  가장자리가 흔들린다. 사물들은 더 불분명해지고 더 개방적으로 되면서 확고한 성질을 다소 잃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특별한 무차별성으로 인해 우애의 분위기를 띠기 시작한다. 타자들과의 사이를 가르는 경직된 경계선은 거두어진다. "그런 근본적인 피로 속에서 사물은 결코 그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것들과 함께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사물들이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은 모두가 함께 어깨를 맞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피로는 깊은 우애를 낳고 소속이나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인간과 사물은 우애있는 "그리고"를 통해 서로 결부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트케는 이러한 개별적 공동체, 개별자들의 공동체가 네덜란드의 정물화 속에 예고되어 있다고 본다. 

"나는 '하나 속의 모두'를 나타내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17세기의-주로 네덜란드의 화가들이 그린-정물화를 보면 실물과 똑같은 꽃들 곁에 여기는 딱정벌레, 여기는 달팽이, 저기는 벌, 저기는 나비가 앉아있다. 비로 이들 중 그 누구도 다른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는, 나의 순간 속에서만큼은, 모두가 나란히 함께 있는 것이다" 

한트케의 피로는 탈진한 자아의 피로가 아니다. 한트케는 오히려 "우리-피로"라고 말한다. 이때 나는 너한테 지치는 게 아니라 너를 향해 지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내 기억으로는 늘 밖에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앉아 있었고 말을 하기도 하고 침묵을 지키기도 하면서 공동의 피로를 즐겼다.... 피로의 구름이, 에테르같은 피로가 당시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고 있었다."

...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평화속의 피로, 막간의 시간 속에서의 피로다. 그리고 그 시간은 평화로웠다... 또한 놀라운 것은 그곳에서 나의 피로가 때때로 찾아오는 평화에 함께 기여하는 듯이 보였다는 사실이다. 피로한 시선이 폭력과 싸움의 몸짓, 불친절한 행동마저도 이미 그 싹에서부터 부드럽게 가라앉히고 완화하기 때문이었을까?"

...

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있다. 한트케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언제나 피로한 상태"라고 상상한다. 그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피로한 자들의 사회이다. "오순절 사회"가 미래사회와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병철 <피로사회> pp. 6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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