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야기

오빠의 본능적 사랑과 나의 미성숙한 사랑의 애씀

misfortune4 2014. 5. 5. 21:55



점점 강신주가 질려지던 때,


내가 오빠와의 관계의 심각성을 느꼈을때-이것이 진정 생의 마지막 사랑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강신주의 사랑학 강의를 들었던 때의 강의록을 조금이나마 기록해두었던 게 생각났다.


http://blog.naver.com/femme34/10130753161


그 강의는 장콕토의 말로 시작한다. 장콕토. 그냥 바로 치명적인 피가 떠오르는 그런 시인.


사랑하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랑받는다는 것, 

한 존재를 불안에 떨게 하는 것 

아-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귀한 

존재가 될 수 없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고뇌. 

-쟝 콕토(Jean Cocteau, 1889-1963), 「사랑」 


언젠가 오빠에게도 보여줬던 게 생각난다. 그때는 2012년이었다. 



강신주의 힐링캠프를 비웃으며 넘겼는데, 다시보기로 보았다.


그의 질문은 하나다. "그를 사랑하는가" 이래서 저래서요.... 하면. "사랑하세요? 아버지를 연인을, 어머니를 사랑하세요?"

그렇다면 그를 알려고 해야한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은 모습은, 사랑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모습-실직, 명퇴, 암투병, 치매-로 당신앞에 서 당신에게 관심과 사랑을 요구할 때

당신은 그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것에 따라 지금까지의 그들의 관계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내게 그가 강연에서 한말 중 단 한마디가 맘에 계속 남는다.

강연 중 모태솔로를 자청하는 패널 김제동이 사자 인형을 들여놓았다며, 인형에 집착하는 자신을 이야기하자

강신주는 살아있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영원에 대한 사랑을 꿈꾸는 유아기적 모습이지, 성숙한 성인의 사랑에 대한 태도가 아니다고 말한다.

인형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래서 죽지 않을 영원의 무생물만을 애정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숙한 인간의 사랑은...

죽음과 이별이 정해진 것을, 사랑하는 태도이다.

곧 떨어질 꽃을 아름다워하는 것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윤동주의 서시처럼.

.... 

영원하지 않은 생명체를 사랑해야만 한다.

그것이 성숙한 사랑이다.


나는 그것을 하고 있지 못하다... 오빠만이 그것을 하고 있다.


강연록을 다시 읽는데, 다시 느껴진다...

나는 오빠를 성숙하게 사랑하지 못했다.


나에 대해 성숙한 사랑을 보인 이는 바로, 내가 원망한 그이다.

너무도 정확하게

그는 성숙한 사랑을 아는 사람이다.


내가, 오빠와의 사랑을 다지기 위해 열심이 몇달간 들었던 강연에서

실제로, 

그 내용대로 살고 있었던 건 오빠였다.

오빠는 그 강연을 듣지도 않았는데, 본능적으로 그러한 모습을 띄고 있다.

나는 뭔가.?




"사랑은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는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해줄지의 여부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사랑받고 싶은 욕망에 대한 처절한 억제가 도사리고 있지요. ... 그래서 정상적인 사랑의 경우라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이 없을 경우 부재의 고통을 심하게 느끼는 겁니다. 상대방으로부터 사랑받으려면, 다시 말해 상대방의 따뜻한 시선을 받거나 상대방으로부터 “나도 사랑해”라는 말을 듣거나, 혹은 상대방의 키스를 받으려면, 그 사람은 바로 내 눈 앞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의 부재는 우리를 고뇌와 번민으로 몰고 갑니다."





다음은 뜬금없이 류시화의 시가 등장한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바람처럼 내 깊은 속에 흘러서 

은밀히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1952출생),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리고 나선 이성복 시인의 시가 읊어진다.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늘 불안합니다 나로 인해 당신 앞날이 어두워지는 까닭입니다 내 곁에서 당신이 멀어져가면 나의 앞날은 어두워집니다 나는 당신을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떠나갈까 안절부절입니다 한껏 내가 힘들어하면 당신은 또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은 팔도 다리도 없으니 내가 당신을 붙잡지요” 나는 당신이 떠나야 할 줄 알면서도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성복, 「앞날」  


.... 마음이 아프다.
또 다시 뼈를 아프게 하는 사르트르의 말이 언급된다. 


"사랑이 유발하는 슬픔에 가슴에 멍이 들어가던 우리에게 기적처럼 상처가 치유되는 순간이 다가옵니다. 부재했던 상대방이 웃으면서 우리 눈 앞에 다시 등장한 겁니다. 이 순간 누구라도 자신의 우울했던 정서가 일순간에 유쾌하게 바뀐다는 것을 확인하게 도리 겁니다. 이 경우 드디어 우리는 자신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숨길 수 없는 사실로 의식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타자가 부재할 때,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소유욕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타자로부터 발생하는 기쁨을 유지하려는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그의 부재가 나에게 고통으로 다가온다는 것이지요. 다른 원인으로 우리는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분명 나는 그를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은 아직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는 나를 사랑할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 자유를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기쁨을 지속하려고 내가 욕망한다는 것과 타인이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게 된다면, 이것은 상대방이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런 경우 과연 우리는 상대방을 곁에 가까이 두려고 욕망하게 될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지기 힘든 것만이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는 법입니다. 이 정도에서 사랑에 빠진 사람의 심리 상태를 섬세하게 포착한 사르트르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만일 내가 타자에 의해서 사랑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사랑받는 자로서 자유로이 선택되어져야만 한다. 알다시피 사랑과 관련된 통상적인 용법에 따르면 ‘사랑받는 자’는 ‘선택된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 선택은 상대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 사실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다음은 헤겔이다.


"갓난아이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머니의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갓난아이들은 어머니가 욕망할 만한 대상이 되어 어머니를 지속적으로 매혹시키려고 하겠지요. 사실 아이가 자기 방을 치우는 것을 좋아해서 방을 치우는 것이 아닙니다. 방을 치우는 자신의 모습을 어머니가 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아이가 공부를 좋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를 잘하는 자신의 모습을 어머니가 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라캉이 열한 번째 세미나,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Quatre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에서 어머니를 ‘대타자(Autre, The Other)’라고 정의하면서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렇지만 우습지 않나요. 사실 어머니의 욕망도 다시 타자의, 타자의, 타자 (…)라는 식으로 무한 소급될 테니까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대타자를 인간의 사회나 역사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겁니다. 어머니가 원하는 아이의 모습이란 다름 아닌 사회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니까 말이지요"



그 다음은 과대 망상이다.

유안진의 시.




말하고 나면 속이 텅 비어 버릴까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해버릴까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사류로 

오염될까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 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라고 

-유안진, 「말하지 않은 말」 





다음단계는, 육체의 사랑이다... 바로 백석의 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탸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흥미로운 대목이다. 

역시 사르트르.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부분에서 나의 손에 깊이 반응할 때, 우리는 자신의 손길이 한때 그 사람을 사랑했던 타자의 손길과 겹쳐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셈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너무 불편하거나 불쾌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역으로 이것은 우리도 자신의 손길을 타자의 몸에 각인시켜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촉각, 즉 피부감각이 가진 수동성(passivity)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촉각은 사랑을 가진 사람의 쓰다듦에 반응한다는 것이지요. 손가락 끝이 분명 성감대이기는 하지만, 상대방을 애무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손가락에서 별다른 쾌감을 느끼지 않는 법입니다. 애무하는 자의 능동성, 혹은 의지와 이성, 그리고 애무당하는 자의 수동성, 혹은 감성. 무척 흥미로운 대조입니다. 그래서 반대로 상대방이 나의 손가락 끝을 섬세하게 만져준다면, 나는 상대방의 손에 통제되는 인형처럼 수동적인 상태에 처하게 됩니다.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 능동적인 입장에 있는 것은 힘들고, 수동적으로 타인의 애무를 받는 감성적인 입장은 쉽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애무를 하는 편보다는 애무를 받으려는 편을 선택하는 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것은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받은 따스함의 경험이 수동적이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겁니다. 연애 시절에 그토록 부드럽게 만져주던 사람이 결혼 생활이 지속되자 애무를 받으려고 할 뿐 애무하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그렇지만 연애 시절 그렇게 적극적으로 애무하던 사람은 왜 그랬을까요? 이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연애와 결혼 사이에 어떤 질적 단절이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애무와 관련된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이야기가 우리의 눈에 들어옵니다. "

애무는 타자의 육체를 내 것으로 가지려는 운동이다. (…) 애무는 단순한 접촉을 원하지 않는다. 애무를 접촉으로 환원시키는 사람만이 애무가 가진 독특한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애무는 단순한 건드림이 아니라 어떤 모양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를 애무할 때 나는 내 손가락 아래에서 그녀의 살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존재와 무


물론 우리의 애무가 타자에게 효과가 있었던 것은 타자에게는 따뜻하게 만져졌을 때 얻었던 편안함에 대한 원초적 경험이 몸이나 정신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불행한 것은 상대방이 자유를 포기하거나 포기하도록 만들었을 때, 상대방을 애무하려는 노력은 의식적인 노력으로 느껴지게 된다는 점이지요. 정말 비극이지요. 상대방이 자유를 가지고 있을 때에는 애무의 노력이 노력으로 다가오지 않지만, 상대방이 나에게 속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애무의 노력은 의식적인 노력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 말이지요. "





진심으로 불행한 일이다... 그리고 가슴아픈 일이다.

오빠의 자유. 아니 무엇보다 나의 자유.

내게 자유가 없었기에, 오빠의 자유를 뺴앗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건, 사랑의 모습을 없애가는 일이었다.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읽고 또 읽었건 그 책이 인용되고 있다. 




"내가 애인의 몸을 만지고 싶은 진정한 이유는 상대방으로부터 만져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애인을 껴안을 때, 상대방도 자신을 꼭 껴안고 있다는 느낌, 이것만큼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없을 겁니다. 어쩌면 우리는 엄마가 되기보다는 항상 어린아이가 되기를 원하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엄마로부터 받은 따뜻한 포옹이 오늘도 애인에 대한 포옹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이것은 성적으로 성숙한 두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섹스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르트도 이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지요.  


성교 외에도 부동의 껴안음이란 또 다른 포옹의 형태가 있다. 우린 마술에 걸린 채 황홀해하며, 잠자지 않고 잠 안에 있으며, 잠들기의 그 어린애 같은 쾌감 속에 있다. 그것은 옛날이야기의 시간이요, 나를 고정시키고 마비시키는 목소리의 순간이요, 어머니에로의 되돌아감이다. (…) 그렇지만 이 어린애 같은 포옹 한가운데서도 생식기적인 것은 어쩔 수 없이 솟아올라, 근친상간적인 포옹의 그 분산된 관능을 차단한다. 그러면 욕망의 논리가 다시 작동하고, 소유의 의지가 되돌아오며, 어린이 아이 위에 이중 인쇄된다. 나는 모성적인 것과 생식기적인 것을 원하는, 동시에 두 명의 주체이다.-사랑의 단상-"




그런데, 그 따뜻한 포옹에서 성교로 이르는 낯선 침략과정을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다. 분열성을 착각으로 치부해버리는..



"바르트는 애인을 품에 안을 때 발생하는 편안함과 따뜻함을 쾌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는 포옹에서 오는 쾌감은 “어머니에로의 되돌아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바르뜨는 성숙한 남녀 사이의 포옹이 가진 분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만져지고 있다는 나른한 쾌감 속에서 갑자기 생식기적 본능이 출현하기 때문이지요. 포옹이 수동성, 편안함, 지속성에 강조점이 있다면, 생식기적 본능은 능동성, 불안함, 단발성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따뜻한 젖을 배부르게 먹고 엄마의 품에서 잠드는 노곤함이 포옹이라면, 속이 불편해서 갑자기 설사라도 하는 것처럼 급작스러운 것이 성교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포만의 지속과 배설의 욕구는 분명 이질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말합니다. “나는 모성적인 것과 생식기적인 것을 동시에 원하는 분열된 주체”라고 말이지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분열성은 가장 민감한 촉각 능력과 생식 능력이 성기라는 동일한 기관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다는 점입니다. 부드럽게 만져주었을 때 가장 만족스럽고 편안한 쾌감을 주지만, 동시에 어느 순간 급작스런 절정에 치달으려는 격정적 쾌감도 함께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주의해야 할 것은 성기적 사랑을 단순히 종족 보존을 위한 본능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불행히도 이런 착각은 플라톤(Plato, BC428?-BC348?)에서부터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까지 어쩌면 지금도 통용되고 있습니다. "



그리고 나서 성의 금기에 대한 이야기로 마친다. 바로 애커만과 라캉의 관심주제. 






"누군가를 만지고 싶은 열정과 누군가가 만져주기를 바라는 욕망에도 불구하고, 나라마다 금기시하는 신체 부위가 있다. 미국에서는 남자가 허락 없이 여자의 젖가슴이나 엉덩이 혹은 생식기를 만지는 것은 금기이다. (…) 피지에서는 누군가의 머리칼을 만지는 것은 미국에서 처음 보는 사람의 생식기를 건드리는 것과 같다. 벌거숭이라고 사는 원시 부족에게도 몸에서 건드리면 안 되는 금기가 있다. 사실 금기가 사라지는 상황은 딱 두 가지다. 상대의 몸을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연인들 그리고 엄마와 아기.-감각의 박물학 


불행한 일이지요. 사회적 금기를 반복하고 있는 상대방이 자신의 성기를 함부로 보이거나 만지도록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기를 만질 수 있거나 섹스를 할 때에만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으니까 말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성기에 금기가 집중되어 있는 사회는 대부분 가부장제의 지배를 받는 사회라는 점입니다. 재산과 권력을 자신의 혈육에게 양도하기 위해서, 가부장제 사회는 순결과 금욕의 이데올로기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지요. 우리 사회의 경우도 미국이나 프랑스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사회입니다. 어쩌면 더 심할 수도 있을 겁니다.


성기적 사랑에 대한 집착은 우리 사회가, 혹은 우리 자신이 어떤 금기를 반복하고 확대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금기를 넘어서 “상대의 몸을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사이가 된다고 할지라도, 두 사람이 성기적 사랑으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든 법입니다. 두 사람은 성기를 통한 성교로 금기를 넘었다는 기억을 공유할 테니까 말이지요. 라캉이 “성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il n'y a pas de rapport sexuel)”라고 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남녀 사이에 순수한 성적인 관계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사회적으로 규정된 성적인 관계만 존재한다는 의미이지요. 


그렇다면 사회 금기체계에 포섭되지 않는 성관계, 서로의 몸 중에서 성기와 같은 어떤 특정 부위에 고착되지 않는 성관계란 불가능한 것일까요? 물론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것은 포옹과 같은 성관계, 혹은 ‘성기적인 것’을 나름대로 극복하고 ‘모성적인 것’이 강해진 성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조바심과 급작스러움이 사라진 성관계이겠지요. 물론 성교와 일정 정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모성적인’ 성관계도 어떤 절정으로 끝나게 될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느긋함의 향유와 같은 모습으로 진행될 겁니다. "


.


.


.

.

.





모든 것이 괴로움 속에도 명확히 인지되었다.


더는, 이 안에서 맴돌것이다.


이로 커플일기장의 내부분을 마친다.



"사랑. 환영. 자유"를 이상시하던 내 삶을, 다시 회복하지 않으면, 나는 죽음을 향해 내딛는 것이 가장 용기있는 선택일 것이다.


이 커플블로그는 애초에, "연인이 된 우리의 사랑, 각자의 자유, 그 환영에 대한 기록"을 담고자 


내가 만든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 개인적인 성토장이 되버리고 말았다.


이 공간을 변질시킨 건 나이다... 그것이 여전히 미성숙한 사랑에 갇힌 나를 대변한다.




나는 이제 오빠에 대해 더 이상 어떤 '말'도 필요 없음을 느낀다.


더는 시행착오도 없을 것같다.


이런 확신은, 가슴이 벅차다.



그래. 접었다면 꿈이 아닌것이다. 


접지 않았기 때문에 꿈인 것이다.



이상적인 사랑을 꿈꾼다. 위와 같은 이상적인 연애를 꿈꾼다. 어떤 제도에도 편입되지 않겠다. 


다시는 흔들리지 말자.  




'그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간을 건다   (0) 2014.11.25
오빠에게 쓰는 후회없는 편지.  (0) 2014.07.22
A-O  (0) 2014.05.02
아무렇게나   (0) 2014.05.01
캠핑 1주일 후...  (0) 2014.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