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야기

내 영화가 어디서 멈추었을까

misfortune4 2015. 8. 30. 15:44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나가서 돌아다니며 돈을 쓰고 밥을 사 먹고 걷고 뛰고 열쇠 따고 들어오는 일밖엔 없기로 정했다. 

겨우 틈틈이 읽게 되는 유일한 책인 <시간의 향기>에서 한병철은 시간의 서사를 읽어버린 현대를 비판한다. 

하지만 시간은 엿가락처럼 끈질기게 들러붙어 나를 힘들게 한다. 

나는 시간이 빠르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의 원심력은 정말 사라져 버린지도 모른다. 

정말 혼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 무언가를 혼자 한다는 건 무엇일까. 그건 그저 혼자임을 의식하지 않아야만 가능한 것일까. 

혼자서는 무엇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것은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에 대한 반증처럼 느껴진다. 방황하지 않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언가를 하는 이에게 방황 중이라는 단어를 붙인다면, 그건 광고 문구 같은 컨셉에 불과할지 모른다.  


자유는 가능성의 세계가 아니다. 가능한 것에서 자유는 싹트지 않는다. 그건 모든 의무와 권리와 책임 안에서 존재하는 것 같다. 

자유는 명령의 세계인 것 같다. 그것을 압박이 아닌, 나의 선택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때, 그 명령의 권한의 전환에게서 자유가 발생하는 것 같다. 의무를 내가 내게 명하는 것. 책임을 내가 내게 지우는 것. 삶의 권한을 내게 주는 것. 그게 자유인 것 같다. 

시간의 권한도 내게 있어야만 한다. 자유로운 자를 이길 카드는 아무것도 없다. 

신자유주의가 이 카드를 쥐고 있어서 이것이 오랜 득세를 점했으리라. 마치 종교처럼 그것엔 자의성이 존재해야만 했다. 



무엇도 쓸 수 있지만 금새 의지가 사라지는 건, 삶이 생각한대로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위선을 떠는 사람이 있고, 그저 그러길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서 매번 자신을 채찍질 하는 사람도 있다.

글을 글대로 가도록 보내거나, 글과 계속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거나, 아니면 깊은 곳에 묻어버리고 다시는 꺼내어 보지 않는 것이다.

갈수록 진실된 글을 쓴다는 것도 읽는다는 것도 어려운가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을 이해하는 그릇이 커지는 것도 아니다. 

어찌보면 사람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어질 뿐이다. 사람들에게 그만큼 깊이 다가갔지만 미끄러지면서 깊은 골의 아찔함 때문에 그 공간이 넓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너나 나나 서로 상처투성이이다. 상처에 대해 깊다고 하지 않는다. 그냥 상처가 많다고 한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무언가를 감추게 되어있다. 그 감춤은 두터움으로 나타나고, 두터운 감정을 건들이기까지가 오래걸릴 뿐이다. 그것을 넓다고 하진 않는다. 그냥 상처가 많다고 한다. 어른들이란 그런 존재인 듯 하다. 나역시 그렇게 늙어가고 있는 듯 하다.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아니 어른들은 무슨 일을 하는가?

아이들을 키우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을 찍고, 아이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교감하려고 노력한다.

아이들은 다른 세계를 엿보이게 한다.

두터운 어른들과는 달리, 즉각적이고 투명하고 상처가 적고 회복이 빠르며 넓게 사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어른들이 서로에 대해 냉소적으로 될 때

아이들은 환기를 준다. 그 세계에는 뭔가 다른 기류가 있다. 


EBS에서 민환기 감독의 <어린 인생>이란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사실 종일 EBS를 틀어놓았고, 그 중 유일하게 이름을 아는 감독의 작품이었다. 절대 TV로 볼 수 없다며 EIDF를 보러 도곡동 EBS까지 다니던 일이 있었다. 이젠 TV에서 영화를 보는 일마저도 적극적이지 않다. 사실 그 영화제에서 초청하는 다큐들은 불분명했다. 이미지를 불러오지도 않았고 TV 교양 다큐멘터리처럼 완전히 시사적이지도 않았다. 뭐랄까. 적당한 것. 적당한 교양. 적당한 비판. 적정선의 예술성을 지향하는 듯한. 이 작품들에서 논란적이란 것의 수준은 그저 약간의 도발에 불과했다. 대다수의 작품이 결론적으로 휴머니즘을 전면화한 것이 많았다. 휴머니즘이 시시한 것이 아닌데, 시시한 작품들은 대개 휴머니즘에 기대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게다가 연출자는 자신이 보기 원하는 이미지들을 반복해내는 작업을 한다. 그것이 마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우리가 마치 그동안 보지 못했다는 듯이-그들은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대상들을 태연하게 연기시키는가 하면 자신의 몸을 시험대에 올려놓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통점은 스스로 무언갈 보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꾸로 보는 자들이 자신을 관찰하기를 은근하게 바라는 작품들이 많다. 카메라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데, 우리는 무엇을 봐야할 것인가. 그들이 봐달라는 것을 봐야만 하는가. 물신적인 영화들이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이 감독의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란 영화 시사회를 본 적이 있다. 필름포럼의 임재철 대표가 제작한 영화라고 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광주 영화제 초대 프로그래머로 전설적인 영화들을 상영했던 사람이다. 그 작품에 대해 잘 써 달란 부탁은 아닌 분위기를 전달받고 돌아오던 길은 너무 추웠다. 마치 그 추위를 다 담지 못하듯 작고 희미한 눈발이 휘날렸고, 나는 이 영화가 이런 분위기와 비슷하다고 느낄 참이었다. 그 길에 한 남자를 만났다. 겨우 양복 하나를 걸친 채 오들오들 떨며 약간 신경질적으로 그는 어디라도 들어가자고 했다. 아무렇게나 들어간 어느 칼국수집에서 내게 아이를 지운 값이라며 30만원을 쥐어주었다. 시세도 모르는 그였다. 부인을 고생시키진 않았구나... 부인과 가정을 지키려는 평범한 가장일 뿐이구나. 내게 애달았던 순간의 이미지들이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왜 낙원동 그 거리에서 그는 이탈리아 여행을 이야기한 것일까. 그날 그 영화는 왜 하필 이탈리아 영화였을까. 영화는 모두 아픈 이미지의 일부일 뿐. 그는 너무 늦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돈을 받고는 웃었다. 그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자꾸 그 돈에 내 초음파 사진이 겹쳐 보였다. 검정 부채꼴 모양 안에 검은 눈을 한 채 발생학 교과서 같은 데서 본 귓바퀴 모양의 생명체가 몸을 구부린 채 꿈틀대던 그 영상이 보였다. 곧 사라질 그 영상이 나는 왜 기뻤을까. 내 몸 안을 실시간으로 본다는 것. 어떤 살아있는 주인공이 내게도 있었다는 것. 그것을 확인한 일이 삶을 깨우는 일과도 같았다. 그것은 내 삶에서 처음 느낀 환희였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썼다. 눈을 감아 보면 내가 보았던 영화들이 재생되고는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 자신을 밝혀주길 바랬던 뇌리에 박힌 이미지들이 사라져가는 것은 억울하고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날아갈 것 같은 공기만이 가득한 영화를 어떤 텍스트로 써내야 한다는 건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졌다. 

유니세프의 후원을 받았다는 <어린인생>은 숲 속의 자연학교에서 자유롭게 노는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온전히 그들의 눈높이에서 찍어내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보인다. 르누아르의 아이들과 한국의 아이들은 백 년을 두고도 친근하다. 하지만 조금씩 자주 움직이는 카메라는 미끄러지고 울고 하는 아이들에게 밀착하여 마치 아주 작은 곤충들의 세계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의미 없는 웅얼거림과 뜻 없는 대화를 던지는 아이들을 그냥 무심하게 보다가 금세 돌려지는 카메라 밑에는 코미디처럼 'OOO (O세)'라는 신원 설명이 붙는다. 이 불필요한 자막들은 우습지도, 진지하지도 않다. 흥미로운 의도로 시작하지만 이것을 진정 관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홈비디오에 가깝다고 해야할까? 이 정도로 아이들의 허우적거림에 거리를 두고 있다면 말이다. 그 거리라는 것이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였다가, 그 결과가 신통찮으면 금세 장치를 치워버리곤 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아이들의 세계를 관찰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어른의 눈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오직 아이들만을 집요하게 관찰한다고 해서 그게 아이들의 세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건 너무 단순한 진리다. 자신이 누구이고, 그런 자신이 지금 여기서 어떤 창을 통해 어떤 대상을 보고 있는가에 대한 자각과 의식이 없는 영상에는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방금 EIDF에서 대상을 받은 <티타임>이란 영화를 본다. 화려한 디저트들을 생물처럼 보여주며 시작하는 영화는 이를 전제로 제시한 채 벌어지는 고등학교 동창 할머니들의 수다를 곁들인다. 많은 여자들이 이 정도로 괜찮게 늙고 싶어할 것이다. 이 영화를 선택한 이들의 눈엔 그런 기대가 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앞에 두고 차를 우려내며 온갖 대화를 나눠보지만 때때로 오래된 감정에 파묻힌 듯 표정이 지워져 버리는 할머니들의 얼굴과 침묵의 순간을 잡아내며 감독은 어떤 의미를 만들려 한다. 그녀들은 여전히 삶에서 남은 것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 추억에서 길어 올려지는 건 정말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공통된 기억에 의지하여 살아가려는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욕구가 아닐지. 먼저 떠난 이를 추억하며 읊는 시구 앞에서도 끝까지 포크질을 해대는 식욕처럼.  


먹음직스러운 디저트 앞에서 삶의 덧없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기라도 하려는 듯, 시중드는 여자를 따로 둔 채 적당히 우아하고 적당히 쓸쓸해 뵈는 중산층 할머니들은 클로즈업을 견딘다. 감독의 어머니도 그들 중 하나이다.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하는가. 표면 사이에 깃든 외로움을 포착하기를 기대하는 영화인가? 감독의 의도를 파헤쳐야 무언가를 제대로 봐낸 것이라고 여기던 때가 내게도 있었고, 많은 이들은 자신의 성숙된 시안을 드러내고자 더욱 그러한 태도를 취한다. 일부 평론가나 교양 있는 어른들의 이 같은 관습이 많은 시시한 작품들에 상찬을 부여하고 있다. 모든 형식의 합당함은 서사에 대해 서사적 해석, 즉 영화가 아닌 글쓴이의 뇌구조를 보여주는 과정을 거친 후 의식적으로 적용되는 듯 하다. 이런 영화를 이런 형식으로 찍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라고.


이창동 감독이 <오아시스>에서 영화에 대해 순수하고 진지한 고민을 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지금껏 힘을 발휘한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자신이 보는 것, 자신에게 보이는 그 무엇에 순수하게 천착한다. 그 영화에는 관객이 무언가를 봐주길 원하는 어떤 지점도 없다. 오직 자신에게 보이는 것에 대한 정직한 믿음으로 움직여가는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면 청계천의 고가 도로 전체를 막은 채 두 배우가 마음껏 춤출 수 있는 괴력마저 발휘한다. 그 무시무시하기만 했던 두려운 나무를 잘라 내고야 마는 힘을 발휘한다. 그런 감독의 신념이 배우들의 사랑을 이룬다. 형식이 서사를 완전히 뒤바꾸어 버린다. <밀양>에서 감독은 종교의 아이러니에 빠져 완전히 다른 영화를 찍는다. 그 영화야 말로 전작과는 완전히 반대로 모든 서사가 해소되고 난 뒤 합당해지는 카메라 형식이다. 신애의 뒷모습을 찍는 일만 하겠다는 의지. 배우를 완전히 서사 안에 놓고,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서사 뒤에 숨은 채 배우의 고통을 보는 이상한 방식에 걸쳐져 있다. 카메라는 서사라는 경계선에 서 있다. 방관자처럼. <시>에서 윤정희가 김용택의 시교실에 나가는 장면들이 있다. 실제 시낭독회에 참여하는 장면도 있다. 그 장면들은 이 영화의 전체적인 모습과 분위가가 완전히 다르다. 그 장면들은 그녀를 대신한 관찰자같다. '박하사탕'에서도 보이던, 그 한국 일반인들의 모임에서 발생되는 이상한 분위기와 이질감. 완전히 섞일 의도는 없으면서도 호기심은 있는 어떤 상태. 그게 문인출신의 감독이 영화를 대했던 태도였을까. 윤정희가 감독의 카메라 앞에 앉아 진짜 자신의 어렸을 적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고백하는 인터뷰 장면 한 컷은 완전히 다른 엑스트라 컷 같다. 감독도 놀라고 그녀도 놀라는 것만 같은 움찔하는 카메라의 느낌. 그 한 컷에서 영화가 시작되었다면 어땠을까. 아네스의 노래가 아닌. <오아시스> 의 활력 이후 점차 허망한 순간에 점을 찍는 감독의 뒷걸음이 아쉽고 쓸쓸하다. 


시적인 것이 가장 영화적일 수 있었던 어떤 순간들을 견디지 못하는 영화. 끝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찍어내는 영화, 그도 아니면 알아서 보라는 식의 영화는 자꾸만 나를 멀리 가게 만든다.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에만 천착하게 된다기보다 방황하는 일의 끝은 낭떠러지 일거란 두려움 때문에 그런 일들이라도 하고 있다. 시적인 순간은 오지 않는다. 나는 무뎌지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보인다. 아니 그러한 진실의 순간을 최대한 연기하고 있다. 외면하는 일처럼 간편한 일은 없으니까. 그것에서 밀려오는 크고 작은 죄의식의 느낌은, 다른 소비, 술, 잠을 부르게 된다. 불면증과 죄의식은 이상한 담합을 한다. 맨숭한 상태는 잠을 주지 않는다. 


나는 자꾸 사라져가는 이미지를 위해 더 이상 슬퍼하지 않고 있다. 슬픔을 받쳐줄만한 어떤 장치도 이젠 없기 때문이다. 나는 마땅히 기억되어야 할 이미지를 위해 더 무언가를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 내가 기억해냈던 것들은 외려 자꾸 오염되어가고 있다. 그 기억에 있는 사람들이 미워졌고, 혐오스러워졌다. 아무도 그 당시의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이젠 모두가 이러한 내 옆에 있기를 희망하지 않는다. 봐야하는 것이 없다. 꼭 봐야만 하는 것이 없다. 상상 속에선 무엇이든 볼 수 있고 무엇이든 기억해 낼 수가 있다. 머리 위 늘 떠다니는 구름처럼 내겐 기억의 데이터베이스가 있다. 그것을 꺼내어 본다. 추억이란 그것을 두려워하여 미리 방어해낸 형태일 뿐이다. 대면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마음 한 켠에 언제나 슬픈 이미지들이 움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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