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

misfortune4 2019. 6. 28. 10:31


영화 <기생충>이 <괴물>보다 좋았냐면 그렇지는 않다. 

<설국열차>에 이게 아닌데하는 마음, <옥자>엔 아무 흥미도 일지 않았던 게 사실.

영화의 스토리에 주제의식이 드러나는 식상한 방식이 점점 보였다.  

 

영화를 오래 보지 않고, 그냥 배경음악정도로 틀어놓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영화가 나에게 다가왔던 생경하고 특별한 경험들이 거의 옅어졌다. 

 

무감각하게 지켜본 <기생충>은 중간지점까지 아무것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박소담이 보여주는 캐릭터가 좋았고 송강호의 부인이 술에 취해 활짝 웃을 때 느껴지는 활기에 시야가 트이는 느낌을 받은 정도였다. 

 

슈렉의 요정대모의 모습에서 변희봉과 닮은 모습으로 변모하는, 가정부의 물젖은 안경이 나오던 인터폰의 이상한 장면이 확실히 복선의 역할은 했겠지만, 위 두명을 보여주는 방식과는 달리 안좋은 묘사의 예감도 들었다. 특히 모스부호를 찍어대는 병든 남편이 나올 때는 큰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기존 가정부 부부와 새로온 송강호 가족의 갈등이 시작되면서 영화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마무라 쇼헤이의 팬임을 자처한 봉중호의 초기영화 느낌이 여기서부터 강하게 나오기 시작한다. 동물적으로 치고 받으며 육탄전을 벌이며 삶을 쟁취하려는 하층민의 열기와 활기를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그러다 그의 카메라가 그들을 꺼내올려 세상밖으로 나오게 하는. 

 

구멍에서 자꾸 나오는 사람들, 파묻는 사람과 기어나오는 사람들.  

자신들의 존재감을 지워버리며 인종혐오적인 행태를 벌이던 백인을 처단하는 인디언의 광기 

그걸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두려움에 찬 카메라

그들이 하는 그대로를 그저 바라보고 있는. 그런 영화. 그걸 보는 사람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사람들이 안타깝고 마음이 무겁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반지하에 살며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자신의 냄새를 한번쯤은 맡아보기도 하는,

그보다는 사정이 좀 나아 고층아파트에 산다해도, 자신이 부리는 아주머니나 운전기사가 어떠한지 한번쯤은 생각해보기도 하는.

그런 영화일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충실한 장르영화지만 현실의 풍경이 인식되고 보이는 영화이다

뉴스영상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이 영화가 하는 지점이 있는데, 그게 이 영화가 단순히 풍경을 보도하거나 나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다루고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선을 넘지 말라는 이선균의 태도나 자신을 벌레보듯 하는 이선균에게 모멸감을 느낀 송강호의 얼굴 모두가 감독과 우리 모두에게 녹아있다고 느꼈다. 많은 사람이 그 순간 어찌할 수 없는 모순의 순간에 처했다고 느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있는 불편한 상태의 우리들이 바로 이 영화가 우리를 데려다놓은 한 가운데 지점이라고 느꼈다. 사람들은 웃기고 하고 난처하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고 통쾌하기도 했고, 결국은 그 지점에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송강호의 난처한 얼굴, 애매한 얼굴. 빈이나 부, 엄함이나 코믹함, 그 어느 한가지로 정의하기 어려운 시대의 희비극 같은 얼굴 자체가 이 영화를 우리에게 투영하게 만든 힘으로 느껴졌다. 

영화를 보고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서 어떤 중년 부부가 눈물이 맺힌 채 꼭 저렇게까지 했어야 했나라며 안타까워 했다.

송강호는 폭우에 집을 잃고 체육관에 누워 팔로 얼굴을 가린 채 '계획없이 살았어야 했다'고 후회한다. 

그러자 아들이 말한다. '아버지 죄송해요'

아들은 자신의 계획때문에 이렇게 된 것을 후회하고 미안해했다.

이 장면은 가장 이상하고 슬픈 장면이었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는 초반의 장면과 대비되면서 낙망감이 들었다.

깊이 절망했을 때의 누군가의 자극은 사람에게서 이성을 빼앗아가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절망이 아닌 기분이 좋고 나쁨으로 더럽고 깨끗함으로 분리되는 사람들의 세계는 그 절망적인 사람들에 위해 위협받게 된다

그러나 결국 그 절망적인 사람들의 꿈이란,

부자들이 남기고 떠난 텅 집을 차지하는 일 뿐이다.

그들은 또 다른 중산층을 꿈꾸고 있을 뿐

다른 계획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란 틀은 그런 식으로 빈과 부를 조작해놓았다.

있는 사람은 어디서든지 살 수 있지만,

없는 사람은 여기가 아니면 죽을 것 같은 것

그것은 단지 돈의 유무가 아니라

정신이 어디에 길들여져있나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아무것도 없어도 어디서든지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모든 것이 풍요로와서 어떤 일을 겪어도 담담한 사람도 없다.

그것이 이 사회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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