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야기

이희중 시인의 시

misfortune4 2017. 11. 4. 21:32



누굴까. 1987년에 등단을 했다니 나이가 짐작이 된다.

지하철에서 만난 수많은 나이든 사람들 중에서 이런 생각과 관찰에 빠져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게 위안이 됐다면 이상할까



나이든 사람의 글은 따뜻함과 아련함이 있으면서도 답답하고 뻔한 귀결이 어른댄다

그게 뭐냐면 교훈같은 것이 자꾸 나온다.

황동규 노인의 시는 제외해야겠지만.


그들이 젊은이들에게서 생기와 어설픔을 동시에 보듯말이다.


그래도 이 사람의 시는 자신의 마음결이 그대로 느껴져서 계속 읽힌다

괜찮았다 이정도로만 살아도 정말 괜찮은 거 아닐까

나이든다는 것에 대해 기대치가 거의 없어서일까



시집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 중에서


<중력을 엿보다-지하철 열차 안에서>


흔들리는 손잡이를 그 여자가 잡아주자

손잡이와 그 여자는 함께 흔들린다


마주서면 그녀의 귀고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살짝 옆모습을 보여줄 때

또는 내가 두 걸음 그녀 옆을 돌 때

귀고리의 거죽을 엷게 덮은 금과 은은 각각

제 빛으로 도도히 반짝인다. 고것이

주인의 귀밑에서 주인보다 조금 더 흔들릴 때

살강거리는 아주 작은 소리

도도한 빛을 쫓아 천천히 객차 안 멀리 

퍼져나간다. 가라앉지 않고


앉았던 그 남자가 일어서자 그 무게는 

의자 위에 잠시 더 남았다가 주인을 따른다

빈 자리에 그 여자가 앉고 그 여자의 치마는 조금 늦게

의자 위에 펼쳐져 가라앉는다


열차가 다시 움직인다

열차의 쇠바퀴가 쇠길 위에서도 겉돌지 않는 것은 제 무게 때문이다

열차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이륙할 수 없다



<편견>


세상에는, 자신이 믿는 단단한 그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말이 많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짜장면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테니스에 미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유에프오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지금 대통령이 잘 한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땅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로또 복권을 사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자동차를 몰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애인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자면서 코를 고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잘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남의 뒤통수를 때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미국을 가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감옥에 있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슬플 때 울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원할 때 성교를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씨팔이라고 욕하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를 닮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미 부모를 용서한 사람과 아직 그러지 못한 사람이 있다

자식과 싸우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이 있다

뭘 아는 사람과 뭘 모르는 사람이 있다

만년필로 글 쓰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이 있다

조선일보를 싫어하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귀신을 믿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거짓말을 자신을 위해 하는 사람과 남을 위해 하는 사람이 있다

약속 시간에 늦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병들었다는 걸 아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통일을 원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사람들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부고>


한 쉰해를 살아보니 이제 알겠다,

내가 나이를 먹는 게 아니고

세월이 나를 둔 채 지나간다는 것.

거울을 보지 않으면

거울을 대신하는 무엇을 이용하지 않으면

남들이 보는 내 모습을 나는 모를 수 있고

잊을 수 있고 멀리할 수 있고,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으로 보는 내 모습은

백번 양보해도, 아직 삼십대.


그래서 나는 가끔, 아주 가끔

한때 사랑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문득 떠오르거나

그 사진을 보게 되거나

같은 자리에 그와 잠시 있게 되면,

태곳적 그를 가장 아끼던 순간의 기분이 되어

가슴이 나부끼면서,

그를 붙잡고 또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오래 하고 싶어진다.

그러다가 아주 조금 거리가 생기면

그와는 더 나아가지 못한 서사,

그와 같이 살고, 오래 거듭 잠자리를 같이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그렇게 살아낸

다른 오늘은 어떠할까를 한꺼번에 생각하려 한다.


그때 내 영혼은 바야흐로

거울을 무찌르고 시간을 뭉개고 있는 것.


오늘 그의 부고가 내게 왔다.

그와 내가 못 이룬 한 생애와 그 일상 낱낱이

한목에 내 눈앞에 밀려와

잠시 머물다가,

아직은 내가 알지 못할 곳으로

사라져간다.




<오로지 하나가 필요할 때>

1

어쩌다 내가 가진 담배 가치 수보다

가진, 불 만드는 도구의 수가 더 많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도구의 수에 맞추어

태울 재료를 더 마련해야 한다는 흔해빠진 압박을 느끼는 한편,


이, 쓸모를 한참 넘치는, 다 헤아리지도 못할 도구를 모아온

내 걸귀 든 술버릇을 반성하려는 한편,

제대로 된 도구 하나를,

얼마든지 아껴도 좋을 멋진 도구 하나를 꿈꾸기도 한다.

앞으로는 아주 마음에 드는 오로지 한 도구로만 담배를 피우리라,

그러면 내 세상은 얼마나 깔끔하고 그윽하고

절제에 가까운 무엇이 될 것인가.


2

사이비 연인들 속에서

나는 꿈꾼다, 오로지 한 사람 진짜 연인을.

앞으로는 아주 마음에 드는, 오로지 한 사람만을 사랑하리라.

그러면 삶은 얼마나 깔끔하고 그윽하고

또한 절제에 가까운 무엇이 될 것인가.


그러다가 담배를 아주 끊게 되기도 할 것이고

또한 그러다가 사랑을 아주 그만두게 되기도 할 것이고

그 오로지 하나인 도구가 쓸모를 다하는 날도 올 것이고

또한 그 오로지 한 사람 진짜 연인이 나를

또는 세상을 떠나는 날도 올 것이고.


나는 가슴속 깊이 병을 앓게 되기도 하고

또한 나는 가슴속 깊이 병을 않게 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