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생 노인이 된 그는 끊임없이 시집을 내고 있다.
시에서 묘사되는 개인과 텍스트의 움직임이 이제 점차 기력을 쇠하고 느려지고 있다.
아직도 이렇게 내 마음의 상태를 느끼며 읽어내려갈 수 있는 시를 써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이 겨울 한밤>
보청기 끼고 나서 나도 모르게
소리 안 나게 문을 여닫곤 한다.
누가 들을까 봐도 아닌데
그리운 문소리도 있는데.
귀 조금 밝히고 보니 이즘 사는 일이
조약돌 밑으로 꼬리 감추는 눈석임물 같다.
흐르긴 흐르는가?
흐르는 감각만 남았는가?
감각들이 연필심처럼 무뎌지고 있다.
창밖 어둠 속에 싸락눈 기척 분명한데.
눈과 귀는 창 앞에서 더듬댄다.
차라리 다 쓴 볼펜처럼 이만 끝!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정말 그럴까? 오디오에선
청각을 뿌리까지 잃은 베토벤이
소리의 어둠 속에서
소리로 노래하고 소리로 몸부림치고
소리로 깊어진다.
겨울밤이 깊어 저릿저릿하다.
<죽음의 자리와 삶의 자리>
집을 나서자마자 방금 나온 방이 생각나는
2018년 12월 28일 아침, 바람도 불어 체감온도 영하 18도.
두툼한 모직 라이닝 댄 코트 입고 나섰어도
곧장 몸에 달라붙는 추위.
마을버스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리 후들후들 떨기 시작하다 버스에 오른다.
안경이 흐렸다가 갠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다.
그래, 다른 감각들도 눈 감았다 뜨고 감았다 뜨곤 했으면!
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예기치 않던 향내 방 안에 은은하다.
살펴본다.
아 한란!
그동안 물을 잘못 주어 여러 난 죽인 텔레비 옆자리에 앉아
며칠 전 선물로 들어온 난이 막 향내를 풍기고 있다.
나는 한란 자주 죽이는 사람,
지금 꽃 피운 곳이 죽음의 자리인 걸 모르고.
깊은 숨 몇번 들이쉬니
창밖 저 아래 밀어논 눈 더미가 내려다보인다.
참샌가, 조그만 다갈색 새 하나
그 앞에서 땅을 쪼고 있다.
그 뒤에 한 마리, 그 뒤에 또 한 마리,
저녁 햇빛 속에 앙증스레 땅을 쪼고 있다.
눈 돌렸다 다시 보니 셋이 머리 서로 맞대고
고개 까딱까딱 함께 땅을 쪼고 있다.
간질간질 정답다.
그렇지, 한란,
그 어디서고 삶의 감각 일깨워주는 자에게
죽음의 자리 삶의 자리가 따로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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