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야기

황동규 새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misfortune4 2021. 1. 14. 13:06

1938년생 노인이 된 그는 끊임없이 시집을 내고 있다. 

시에서 묘사되는 개인과 텍스트의 움직임이 이제 점차 기력을 쇠하고 느려지고 있다. 

아직도 이렇게 내 마음의 상태를 느끼며 읽어내려갈 수 있는 시를 써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이 겨울 한밤>

보청기 끼고 나서 나도 모르게

소리 안 나게 문을 여닫곤 한다.

누가 들을까 봐도 아닌데

그리운 문소리도 있는데.

 

귀 조금 밝히고 보니 이즘 사는 일이

조약돌 밑으로 꼬리 감추는 눈석임물 같다. 

흐르긴 흐르는가?

흐르는 감각만 남았는가?

 

감각들이 연필심처럼 무뎌지고 있다. 

창밖 어둠 속에 싸락눈 기척 분명한데.

눈과 귀는 창 앞에서 더듬댄다. 

차라리 다 쓴 볼펜처럼 이만 끝!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정말 그럴까? 오디오에선

청각을 뿌리까지 잃은 베토벤이

소리의 어둠 속에서

소리로 노래하고 소리로 몸부림치고

소리로 깊어진다.

겨울밤이 깊어 저릿저릿하다. 

 

 

<죽음의 자리와 삶의 자리>

집을 나서자마자 방금 나온 방이 생각나는

2018년 12월 28일 아침, 바람도 불어 체감온도 영하 18도.

두툼한 모직 라이닝 댄 코트 입고 나섰어도

곧장 몸에 달라붙는 추위.

마을버스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리 후들후들 떨기 시작하다 버스에 오른다.

안경이 흐렸다가 갠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다. 

그래, 다른 감각들도 눈 감았다 뜨고 감았다 뜨곤 했으면!

 

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예기치 않던 향내 방 안에 은은하다.

살펴본다. 

아 한란!

그동안 물을 잘못 주어 여러 난 죽인 텔레비 옆자리에 앉아

며칠 전 선물로 들어온 난이 막 향내를 풍기고 있다. 

나는 한란 자주 죽이는 사람,

지금 꽃 피운 곳이 죽음의 자리인 걸 모르고.

 

깊은 숨 몇번 들이쉬니

창밖 저 아래 밀어논 눈 더미가 내려다보인다. 

참샌가, 조그만 다갈색 새 하나

그 앞에서 땅을 쪼고 있다. 

그 뒤에 한 마리, 그 뒤에 또 한 마리,

저녁 햇빛 속에 앙증스레 땅을 쪼고 있다. 

눈 돌렸다 다시 보니 셋이 머리 서로 맞대고

고개 까딱까딱 함께 땅을 쪼고 있다. 

간질간질 정답다.

그렇지, 한란, 

그 어디서고 삶의 감각 일깨워주는 자에게

죽음의 자리 삶의 자리가 따로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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