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야기

무제

misfortune4 2013. 2. 5. 17:17

1.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갈 것인지, 글을 쓸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두고 저울질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이 같은 생각을 적어도 서른 번은 넘도록 한 듯 진부하고 또 지루한 오후 4시이다. 이 시간이 되면 괜히 파마를 하러 갈까,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갈까, 조용한 카페에서 고요한 음악을 들으며 독서와 성찰의 시간을 보낼까를 고민하곤 한다. 나는 왜 종종 이 세 가지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일까 생각해보니, 내 문제에 대한 해소의 장을 어떠한 것으로 지정하는 지에 대한 환경적 고민과도 같은 것이다. 부드러운 머리칼에 탄력과 컬을 주어 느끼는 상쾌한 쾌감은 그 어떤 치장보다 황홀할 것이다. 하지만 미용실을 나와도 변해있지 않는 현실의 접근점 앞에 서면 다시 현실들로부터 또 다시 분리되는 경험을 한다. 그렇다면 나는 머리를 한 채,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가야할 것인가를 묻는다. 그래. 나는 우울증 병력을 남기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앓았던 병에 대해서 알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내가 병을 인지하는 이상 그것은 과거형이다. 나는 우울했기 때문에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 내가 지금 우울증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간소한 차이로 늘 나는 나의 병으로부터 빠져나와 있기 때문에 이런 인지도, 글도 가능한 것이다. 여튼 내가 병원의 진단표에 나를 대조하지 않는 이상, 나는 병자가 아니다. 문제는 병원의 진단표이지, 나와 사회와 가족의 역학관계가 아니다정말 그런가? 에 대해서는 다음에 묻기로 하고, 하지만 카페에서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며 잔뜩 쌓인 책을 읽는다면 나는 또 다시 침체에 빠지고 말 것이다. 언젠가부터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허무맹랑한 의식들이 치고 올라온다. 손하나 까딱할 의지도 없는 주제에 솟아오르는 의식들. 그것을 다스리려 고요한 음악을 들으면 나는 슬픔에 휩싸인다. 그래서 다시 격렬한 음악을 들을라치면 분노와 저항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면 나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의 문제에 대해 나는 어떤 대응을 할 것인가? 누군가의 말대로 매일 쓰러져 잘 만큼 바쁜 일을 찾고 만들어야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울함이란 한가함을 견디기 어려운 상태일 뿐인가. 바쁜 자는 우울할 틈이 없는가. 우울은 시간성을 동반하고 있는가.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사무실 풍경의 우울함은 한가한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는 것인가. 1초라도 늦으면 신호등에 걸리는 낙오자가 되는 것처럼 달려대는 차들은 사회의 우울함을 통쾌하게 날려버리는가? 시간에 속도를 가하는 일이 우울함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가? 그것은 미루어지고 어딘가에 남겨지는 것은 아닌가. 남겨진 우울들은 과연 누가 처리해주는가? 결국 자신이 돌아와 대면해야 할 자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이 문제를 그대로 안은 채 가끔 돈이 생기면 파마를 하고, 가끔 마음이 평정으로 돌아올 때쯤 카페에 가거나 영화를 보고물론 이것의 횟수는 갈수록 뜸해지고 있지만병원에 찾는 대신, 선물로 받은 새 번역 성경을 들척이거나오늘은 토기장이 비유를 읽었다트위터, 페이스북 따위에 지저귀곤 한다. 병원상담 게시판을 이용해보았지만 그곳은 교과서적인 답변과 치료비용에 대한 답만 얻을 수 있을 뿐, (eye)을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나는 눈을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를 본다는 상상은 기분 나쁘지만, 내 마음과 생각을 토로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때, 그 눈이 없는 대상 앞에서 좌절하는 일은 진실로 나를 지치게 한다. 벽에 대고 얘기할 때 고스란히 나에게 와서 박히는 그 토로들은 내 어깨와 머리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버린다. 혈장헌혈이 더 힘들 듯이, 그런 것일까. 한번 빠져나갔다가 들어온 그것들을 받아 주섬주섬 다시 챙기고 일어나는 일이 나의 정신을 얼마나 고갈시키는지 모른다그렇다. 그것은 서로가 모르는 일이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일어나는 정신의 일을 모른다. 영혼이라고 이야기하기 껄끄러운 그 순수성에 대한 그 무엇까지도. 나는 소수의 특정인들에게(때문에) 있는 신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 세상을 떠받들고 있는 특정인들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본다. 매일 그 소수지만 다수일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 대열에 서고 싶다는 소망으로 살았던 시간이 내게도 있었다. 소망을 버려가게 된 때를 기억한다. 내가 신실한 사람이었을 때 갖지 못했던 여성에 대한 성적인 느낌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나는 기독교에서 타락 운운하며 금기시하는 여성성을 입었다. 금기는 욕망의 반영이다. 성스러움을 강요하며 여성에 대해 조항과 규율을 내거는 많은 기독교 교리가 나는 무서웠다. 나는 성을 욕망했다기보다 소망을 떠나오니 너무 추웠고, 낡은 옷이라도 입어야 했다. 남들이 입다 버린 옷을 뒤늦게 찾아 입었다. 다른 점이라면 나는 그것이 소망(날개)이 없는 옷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뿐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모든 것이 역순이었다. 키스보다 섹스를 먼저 한 여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애무를 받아본 적이 없고 그것이 무슨 느낌인지 거의 몰랐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스럽게 안아준 적이 없다. 실컷 때려놓고 스스로의 미안함으로 안아준 적 이외에는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본 일이 없다. 오빠를 만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내 존재를 포옹해주지 않았다.


2.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식의 말들을 쓰다보면 내가 일주일에 한번은 밤을 새며 글을 썼던 생각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 어떤 공식적인 일도 못되었다는 것이 뼈아프다. 때론 낯간지럽다. 그래도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은 예전에 좋아했던 작가들의 글을 읽을 때 생겨난다. 황동규의 시집은 신간이 나올 때마다 사서 아무 곳이나 들척댄다. 딱히 꼼꼼히 읽으려고 사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란 내가 태어난 해 출간된 시집 한권에 사로잡혔던 강렬한 기억 이후의 일이다. 여전히 유운성, 김성욱 평론가의 글을 찾아 읽듯이 습관처럼 그냥 사둔다. 영화잡지는 별 볼일 없는 영화들이 판치는 때에도 출간되어야 하고 글을 생산해내야 하는데, 특정 배급사의 지원을 받을 때 호감도 표시가 없는 글을 쓰기는 어려울 일이다. 독립영화판도 다르진 않았던 듯하다. TV보다 못한 다큐멘터리에 호의감을 표시하기란 그저 주제의 진정성, 노동의 아름다움 같은 어구들 뿐이었으니. 사실 내가 횡설수설 하는 이유는 레오 까락스의 홀리 모터스 4월 개봉을 앞둔 기자회견 기사를 보고난 이후의 상태 때문이기도 하다. 어서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하지만 정말 나는 그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그래서 적어도 4월엔 그 영화가 나에게 중요하게 존재할 수 있는 상태이기를 기대해본다. 그런 일말의 기대감이 내게도 생겼다는 작은 흥분이다. 내가 이 회사의 사람들에게 발전이 없음을 확언하는 이유는, 아무도 자신보다 나은 사람과 교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며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흠집내거나 그들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이 대다수인 집단엔 발전도 반성도 화합도 없다. 그 밥에 그 나물끼리 밥을 먹고, 조금이라도 먼저 승진한 사람에 대해서 배타적인 이 집단엔 진심도, 아름다움도 눈씻고 보기 어렵다. 물론 내가 먼저 제안하기 전까진 아무도 나에게 밥을 먹자고 하지 않는 이 곳 사람들이 나를 잘난 사람으로 오해해서는 아니다. 그저 뭔가 자신보다 조금은 못하거나, 이해관계가 적거나 지위가 낮아서 동정 비슷한 느낌이 가는 사람에게 밥 먹자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부담스러운 것에 대해 쉽게 부정적인 느낌으로 정의내리는 사람들이다. 즐거운 부담과 관계에 대한 도전이란 게 무엇인지, 이 자기안위가 일상의 원리가 된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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