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야기

김규항 신간 / 김광석 목소리

misfortune4 2017. 9. 16. 16:29


김규항의 책을 읽고 있다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라는 아포리즘

아포리즘: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 금언 ·격언 ·경구 ·잠언 따위를 가리킨다 

비급 좌파라는 타이틀이 더 유명한 김규항(1962-)에 대한 설명은 링크된 위키백과에 자세히 있다.


그가 지금까지 주목해오고 싸워온 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의 아이들의 교육과 기독교라는 종교를 유달리 비판해온 사람이다. 그는 좌파에서도 왕따처럼 보인다. 


나의 실제 삶과 너무 멀리 있는 논리이나 본능적으로 깨달아지는 것들이 있다.


사람에겐 최소한의 부가 필요하듯 최소한의 가난도 필요하다. 우리는 부의 부족이 아니라 가난의 부족 때문에 더 이상 자유롭지도 행복하지도 못할 수 있다.

누구나 인생을 마감할 때가 되면 제 인생에서 가장 자유가 넘친 시기는 그것을 누릴 여건이 가장 빈약했던 청년 시절이었음을 깨닫는다. 사람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부는 생각보다 작다. 그걸 넘어서는 부는 실은 자유를 빼앗아 간다.


사람이 살다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는 법이지만, 좋은 일엔 반드시 나쁜 일이 수반되고 나쁜 일엔 반드시 좋은 일이 수반된다. 그리고 사람은 대게 좋은 일에 수반되는 나쁜 일을 통해 좀더 나빠지며, 나쁜 일에 수반되는 좋은 일을 통해 좀더 좋아진다.


가난한 사람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건 무작정 돈을 좇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가난에 대한 인간적 자긍심의 여지를 남겨 준다. 가난한 사람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건 "돈보다 중요한 가치를 좇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 중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대상화할 수 없다. 흔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으로 구매할 수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은 돈으로 구매할 수 없는 것에 다가갈 수 없다.


대의란 형편이 나은 내가 나보다 못한 사람들의 필요를 우선하는 것이지 힘든 내가 나보다 훨씬 형편이 좋은 사람들의 필요를 우선시 하는 게 아니다. 

삶의 격식은 언제나 삶의 내용보다 넘치지 않는 게 좋다.


배운 사람들은 언제나 제 머리통 속에 수집해놓은 동서고금의 온갖 지성의 부스러기들을 조금씩 내비치면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구별 짓곤 하지만 정작 삶의 치열한 국면에서 그들은 그들의 지성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죽음에 직면에서도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지성을 하향조정할 필요가 있다. 


세상은 '청년시절에나 하는 운동'으로 바뀌는게 아니라 일생에 걸쳐 지속되는 신념들로 바뀐다.


사름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일생에 걸쳐 일상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의 삶에서 '흥행감각'을 뺀다면 뭐가 남을까? 우리 삶은 어느덧 이야기를 잃고 있ㅅ다.


'나는 상품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좀더 훌륭하게 살 수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우애나 연대 없이 행복할 수 없다.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경로는 사랑이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을 확신할 때 우린 어지간히 고단한 삶속에서도 행복하다.


사람이 삶을 바꾸려면 언제나 그걸 주저하게 만드는 사정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 사정들을 완전히 해결하면서 삶을 바꿀 방법은 사실 없다. 왜냐하면 그 사정들이란 대개 기존의 삶이 제공하는

크고 작은 기득권과 관련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 않아야 할 일은 반드시 하지 않는 게 좋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때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역시 마음의 평화를 위해


신자유주의가 사악한 체제인 건 다수를 가난하게 만들 뿐 아니라, 삶과 관련한 모든 문제들을 경제라는 한 가지 기준으로 해석하고 가치를 매기도록 만들어 삶 자체를 소거해 버리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은 경제적 불의와 싸움은 물론, 삶에서 경제 외의 다른 기준을 지키고 확보하는 싸움이다.


경제의 어원은 '살림'이다.

경제력이 있다는 건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 돈의 쓰임을 

조화롭게 하는 일이다. 

삼성을 타도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삼성을 진심으로

경멸하는 것이다.

삼성 직원인 동창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

동생이나 조카나 자식이 삼성 직원인 걸

은근히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노동운동이 쇠락하고 있다고들 하지만 노동자의 자식이 자본의 가치관으로 

키워지는 것, 노동자가 제 아이를 노동자로 키우지 않는 걸 교육의 목표로 삼는 것에 비하면

그런 걱정은 오히려 한가한 것이다.

아이들은 대개 노동운동을 적대하는 노동자, 혹은 노동자를 경멸하는 노동자로 키워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한국 교회의 천박함이 천박한 목회자들 탓인양 말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의 욕망에 최적화한 교회일 뿐이다.


내일(미래)를 걱정하느라 일생동한 오늘(현재)을 생략하는 어리석은 삶이 

자본주의가 만든 노예제다.

왜들 그리 체제 안에 못 들어가서 그 안에서 한 칸이라도 못 올라가서 난리일까.

꼭대기까지 가봐야 부자의 상머슴 노릇인데, 오늘 하루 배곪지 않고 나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대화하고 산책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천국인 걸.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걱정으로 지배하는' 체계다. 자본주의는 끝없이 걱정하게 만드는 것만으로

끝없이 지배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걱정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지배당하지 않을 순 있다. 

내가 지금 무엇을 걱정하는 건지 잊지 않는다면,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면.


세상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건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제대로 된 눈, 즉 교양이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능력을 가졌어도

자신을 들여다볼 줄 모르는 사람,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인 줄 아는 사람처럼

불쌍하고 초라한 사람은 없다. 


교양이 문화적인 지식이나 감정표현의 절제, 우아한 말과 행동 따위라는 생각은 봉건적이다.

교양이란 '사회적인 분별력'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 그게 교양이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림이 '교양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양식 있게 산다는 건 양식 있는 어휘를 사용하는게 아니라 크든 작든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가 걸린 일에

양식 있게 판단하는 것이다. 실은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고 그걸 지키는 사람들은 매우 적다. 


갈수록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모든 걸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면서 모든 걸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차고 넘친다. 세상은 안개에 갇히고 체제는 콧노래를 부르며 힘을 더해 간다. 


보수적인 교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보수란 사상이 아니라 그저 '욕망'이다.

남보다 더 가진 걸 내놓지 않으려는 노력이 사상인가.


언제나 그러하듯 보수는 오늘의 안락함을 포기하지 않고

극우는 오늘의 이권을 포지하지 않는다.

그러니 안 쓴다면 모를까 글쓰기가 급진적이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아이들은 스스로 결론을 내려간다. 그들이 어른들과 다른 단 하나는 제가 내린 결론을 지키는 일을 명예로 안다는 점이다. 어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다.

아이라 불리는 인간들이 어른이라 불리는 인간들과 가장 다른 점은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혹은 "세상이 다 그런 거지"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희망인 이유.


존중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존중하지 않으면서 사랑할 순 없다.


아이에게 사과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미루거나 생략해도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내적 존중, 즉 관계의 실체는 여지없이 파괴되어 간다.


아이를 보며 종종 되새겨야 한다.

'나는 이 사람을 잘 모른다'

아이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데서 부모의 비극이 시작된다.


체벌은 어른의 교육적 무능을 자인하는 의식이다.

때리지 않고도 몇십명의 아이를 통솔하는 건

교사의 직업적 전문성에 속한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교육도 교수권도

수행할 수 없는 교사는 교사직을 포기해야 한다.


교사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따뜻하든가, 합리적이든가. 따뜻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교사는 아이의 정신에 흠집을 낸다.


어떤 악랄한 파시즘 체제도

'탄압하기 위해' 검열하진 않는다.

모든 검열은 순진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반대한다고 해롭다고 말하는 것과

국가가 법적으로 금지하거나 규제해야 한다는 건 전혀 차원이 다르다. 

전자는 민주적인 토론이지만 후지는 민주적 토론과 우리의 권리를 잃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아니 어쩌면 거의 언제나 '내 자신을 위하여' 자식을 괴롭히고

'내 애인을 위하여' 애인을 괴롭히며

급기야 '내 국민을 위하여' 국민을 괴롭힌다.


진보적인 시민들은 체벌이나 억압적 교육 같은 권위주의 교육엔 단호히 반대하지만

아이가 학원을 돌며 시들어가는 신자유주의 교육 상황은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그들의 모습은 체벌과 억압적 교육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말하던 독재자 시절 시민과 

수십년의 시차를 두고 빼닮았다.


진정 종교적인 건 더이상 종교적일 필요가 없다.


겸손하지 않은 건 신앙이 아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건 나와 온 우주 만물이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내 존재가 우주 만물의 일부일 뿐이라는 절대 겸손이자 내 신념에 우주 만물의 힘이 개입한다는 

절대 용기다.


성숙한 종교인은 다른 종교를 '같은 산을 오르는 다른 등산로'라 여긴다.

훌륭한 신앙은 개방적일 수 밖에 없다. 신앙은 신의 뜻을 온전히 따르려 하면서도

신의 뜻을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는, 신 앞에 겸허히 선 상태이기 떄문이다.


한국에서 교회를 나간다는 건

신앙을 포기할 각오를 했다는 뜻이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사는 유신론자도 있고 하늘의 이치에 순응하며 사는 무신론자도 있다. 

예수가 선포한 새 세상은

기독교인들보다는 오히려 기독교를 달가워하지 않는 일군의 사람들,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급진적이상주의자들에게서 실천되고 구현되어왔다. 그들이 예수의 참 제자들.


회개란 교회 안나가던 사람이 교회 나가는게 아니라, '삶의 방향을 뒤집는 것'이다.

물질의 부와 영혼의 부는 한 사람 안에서 동거할 수 없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신은 우리 삶의 외부에서 우리 삶을 관장하는 절대적 존재다.

그런 신관은 종교를 사람을 해방시키는 게 아니라 구속하는 도구로 만든다.

그러나 부처도 예수도 그 따위 신은 없다고 했다.


하느님은 내 안에 존재하며 또한 모든 다른 내 안에도 존재한다. 내 남편에게도 내 자식에게도 내 부하나 노예에게도.

'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 모든 낯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은 존재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건 나를 사랑하는 일이자 동시에 모든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예수는, 새로운 사회의 실체는 그 체나 법 같은 형식이 아니라 그 사회 성원들의 지배적인

삶의 방향과 결에 있음을 되새겨준다.


예수는 우리에게 올바로 살기 위해 고통과 헌신을 감수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실은 인생의 진짜 즐거움과 행복을 좇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하느님은 복을 주신다. 하느님은 부자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에게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부임을 알게 하신다. 하느님은 명예를 얻고 싶어 잠을 못 이루는 사람에게 겸손이야 말로 가장 큰 명예임을 알게 하신다. 하느님은 권력을 얻고자 눈이 빨개진 사람에게 섬기는 삶이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임을 알게 하신다. 


예수는 사랑과 용서의 결정체인데 왜 사형당했을까?


예수는 사랑과 용서의 결정체이되 '사형당할 만큼 위험한' 사람과 용서의 결정체인 것이다.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유지 되는 건 오해와 멸시 속에서 묵묵히 인간의 길을 가는 작은 예수들 덕이다.

예수는 개인 내면의 해방과 사회 구조의 해방이 하나라는 것, 그 둘이 분리되거나 한 쪽이 배제될 때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지배체제와 불화하지 않으면서,

아무런 오해와 곤경에 처하지 않으면서,

이쪽에서도 칭찬받고 저쪽에서도 존경받으면서,

예수를 좇고 있다 말하는 건 가소로운 일이다.

그들은 실은 예수의 이름으로 제 말을 할 뿐이다.


사형은 커녕 1년 내내 뺨 한번 맞을 일 없이 안락하게 살아가면서

예수 흉내로 세상의 존경과 명예를 구가하는 건 예수를 팔아먹는 짓이다.

자본주의를 지지하면서 예수의 이웃사랑을 실천한다는 건 모순된 일이다.

예수의 이웃사랑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힘 내!" 라고 쉽게 말하는 건, 남의 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 위로의 의미로든 충고의 의미로든 고통의 객관성(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생각해봐, 따위)을 말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고통엔 현재성이 있을 뿐이다.


가짜위로를 비판하는 일이 진짜 위로를 낳진 않는다.

많은 경우에 다른 이의 고통에 연대하는 최선의 방법은 침묵과 절제다.

침묵 없이는 잘 말할 수 없고 절제 없이는 잘 행동할 수 없다. 

그러나 말해야 하는 순간에 침묵하고

행동해야 할 순간에 절제하는 것처럼

비굴한 일은 없다.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눔은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남은 걸 나누어주는 게 아니라

남보다 많이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나눔은 고통에 처한 사람에 대한 연민에서 시작하지만

연민에만 그칠 때 나눔은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쇼로 전락한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 쇼에 참여함으로써 그런 고통스러운 현실에 자신의 안온한 삶이 관련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지적 의심을 씻어낸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우리가 미안해해야 할 아이가 있을 뿐.


약자의 편에 선다는 것이 유별나고도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단지 당연한 공평함을 회복하려는 노력일 뿐.


파렴치한 행동이 평범한 것이 되고 정상 범주의 행동이 특별한 것이 될 때 그 사회는 괴멸 직전에 있다.


유토피아는 점심을 거르는 아이들을 알면서도 오늘 점심을 뭐로 떄우나 고민하는 시민들의 구차한 삶 속에서도,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전직 혁명가의 새삼스렁룬 외침 속에도 없다.

유토피아는 '아무 것도 아닌' 준법 서약서 한 장 못 쓰고, 

아들을 기다리는 칠순 어머니에게 "오래 사셔야 돼요"라고 말하는 내 동갑내기 장기수의 영혼 속에,

사람들이 '미망'이라고 비웃는 그 고결한 영혼 속에나 있다.


나쁜 구조 덕에 안락을 얻은 사람은

그 구조와 분명히 마주서지 않는 한 나쁜 사람이 되게 되어 있다.


가난한 사람이 왜 생기는가? 남보다 많이 가진 사람이 존재하기에 생긴다. 하느님 앞에서 부자는 합법적으로 이룬 부라 해도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죄인인 것이다.


남보다 호사를 누리는 게 자랑이 아니라 머리를 긁적이게 하는, 대개의 사람이 그 정도의 양식을 갖춘다면, 천국에 다가간게 아닐까. 


-----------------여기까지 읽었고 그냥 내가 편집했다... 아직 절반이 남았다.



이젠 일해야겠다. 


그동안 힘들때마다 들었던 김광석 노래를

이제 듣지 않기로 했다.

서해순의 지갑에 돈을 넣어주고 있는 일임을 거의 99프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아니러니한 위로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을 터.


김광석의 아내 서해순은 

정말 요괴같은 여자였을까.


그가 쓴 아픈 사랑노래들은 그녀를 향한 것이라고 한다. 


결혼사실을 속이고 아이도 살해한 사실을 알고도

자신을 사랑해준 남자.

결혼 후에도 당당히 애인을 만나고 건물 빌딩과 곡의 모든 저작권을 요구한 뻔뻔하고 파렴치한 여자를 

끝내 버리지 못한 남자를

전과 13범인 오빠와 작당해 죽이고

장례식이 벌어지는 시간에 애인에게 3천만을 송금했던 여자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음원으로 인한 100억원대의 수익을 챙기면서도

대구시 사업으로 그를 위한 추모공간을 만들어

거대한 문화적 수익을 여전히 챙기고 있는 그 괴물같은 여자를 

김광석은 아픈 마음으로 여전히 쳐다보고 있을까.


그리 모질지 못하고 사람보는 눈도 없이 약지도 못한 사람이

어찌 노래 목소리는 그토록 우렁찼던 것일까.

그렇게 전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삿말을 쓰던 이는 한낱 자신의 반려자가 될 사람하나를 왜 분별해내지 못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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