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야기

우리는... 앞으로

misfortune4 2013. 4. 12. 15:56

결혼이란 제도가 양산해 낸 많은 형태의 관계들을 본다. 결혼한 남자와 결혼한 여자, 그들이 함께 살며 낳은 아이들, 이혼한 남자와 이혼한 여자, 전 남편과 전 부인, 결혼시기를 놓치거나 자발적인 미혼녀와 미혼남. 이혼한 남자의 애인과 이혼한 여자의 애인, 결혼한 남자의 애인과 결혼한 여자의 애인, 그 애인의 형태 또한 결혼-이혼-미혼으로 각각 나누어지니 실로 그 만남의 형태란 다양하다. 


정규직이란 제도가 양산해 낸 여러 형태의 일자리를 우리는 보며 산다. 아침에 마주치는 10급 공무원 환경미화원, (과거엔 비정규직이 없었으니)  정규직이었다 퇴직했을, 새벽같이 신문과 폐품을 줍는 노인들,  지하철 청소부인 용역업체의 파견노동자, 지하철 개찰구 봉사를 하는 노인회 할아버지들은 물끄러미 바삐 출퇴근하는 젊은이들을 쳐다본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급직 노동자들, 직원의 출산, 육아휴가나 외부출장들으로 생긴 자리를 매꾸는 몇달짜리 임시직 사원들, 파견업체에서 온 파견계약직 노동자들, 그리고 자체에서 계약한 2년 계약직 노동자들,  비정규직 법안 이전의 긴 임시직 생활 끝에 상시계약직이라는 명함을 단 정규직이 아닌(승진기회도 없고 연봉협상도 없으며 주요 사업,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없는) 정년보장 노동자들, 그리고 허울좋은 만년 과장들과 고속승진을 하는 젊고 잘나가는 정규직 사원들까지.

사실말해 비정규직 중 정규직 전환이 되는 확률을 바라고 들어오는 것은 초짜나 가능한 일이다. 

우리같은 오래된 비정규직들은 이것이 스쳐가는 직장이라는 인식에서 거의 다른 가능성을 두지 않는 편이다. 정규직은 어짜피 언제 떠날지 모르는 비정규직들에게 정을 주지 않는 일에 익숙하다. 그저 사무실 분위기를 살리는 분위기 메이커 정도로 쓸모있게 다루려 하는 것이 최선의 모습이다. 나는 자발적 비정규직이다. 모든 것을 알고 들어왔다면 그것이 맞는 말이다. 


당신은 미혼녀 애인을 둔 이혼했던 결혼남.

나는 결혼남 애인을 둔 자발적 미혼녀.


당신은 개인사업을 앞둔 정규직 이사

나는 개인백수를 앞둔 비정규직 노동자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 그러니 당신도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 가족 얘기도, 일 얘기도 통하는 사이.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인간적으로 서로 애착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가능한 일이다.

절대로 서로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 한에서. 

초짜는 할 수 없는 일. 

그렇다고 내가 고수는 아니다.


나는 힘들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힘들게 사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나는 힘들고 싶지 않다.

나는 고통을 이겨내 왔으며 앞으로도 고통을 이겨낼 것이다.

온전한 의지로 죽으려면

나약해져서는 안된다. 


사회의 제도가 만들어낸 다양한 정체성에 굴복하지 않으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는 굴복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제도들이 불편하고 힘이 든다. 내가 과연 이 굴레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미' 혼, '비' 정규직을 벗어야 한다는 의지는 결혼(취집)과 정규직 취직으로 가능할 일이다. 

그것은 간단한 것이다. 능력을 키우는 일이 쉽진 않겠지만 방법은 단순하다. 

나는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고 싶다. 

벗어나는 것은 나 개인의 문제가 된다.

누군가는 내가 벗어난 자리에 들어오게 되어있다. 제도는 변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극복하는 것은 보다 사회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나 한명이라도 무언가를 극복한 사례.


일본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직장의 신'을 비정규직 언니들을 아무도 보지 않는단다. 불편해서. 그렇겠지.

김혜수같은 능력자가 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으며 정규직에 맞장 뜰 방안도 없이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자발적 비정규직들이 대다수라는 사실은, 내 10년이 보증한다.


평생 누군가의 애인으로만 산 옛날 조선왕조시대의 이야기, 외국 고전 영화들의 이미지 속에서 아름답고 처연하게 바라보았지만, 실상은 그런  운명에 대한 연민과 끌림으로 위안을 받을 뿐이다. 실제적인 대책이 필요하고, 남다른 가치관 확립과 실천력이 필요하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문제를 고민한지 오랜 시간 되었다. 

아직 해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 상태로 살고 있다.

자발적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결혼과 직장의 문제에 대해 아직도 자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 기준과 마음에 확실치도 않은 제도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결혼과 정규직이 확실한 행복의 키라고 보지 않았다. 단 한번도 가족이 있어서, 직장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이 때에 한번 없어봐라 어떻게 되나하고 묻는 질문처럼 바보같은 논리는 치우자. 없을 때에야 행복을 느끼는 것을 진정한 나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행복은 적극적이며 절대적으로 내가 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에 있으니까)

확실치 않은 시대에, 결혼/정규직 마저도 위기에 흔들리고 있는 시대에, 그 밖에서만 볼 수 있는 위치에서 

그 안정적인 기본제도의 불안정하고 떄론 편협하고 이기적인 양면성을 보고, 알고 싶었다.

나는 가정에서 행복하지 않고, 정규직 안에서도 안정하지 못한 채 끝없이 욕망하는 모습에서

그 제도에 대한 매력보다 그 제도에 편승되고 싶지 않다는 반발감이 더 컸다. 

그러나 지금 내 모습처럼 그 제도의 변방에서 사는 내 모습도 별볼일 없이 흐르고 있다. 

마치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도를 닦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그건 아니지 않을까.

내가 도를 닦기 위해 이런 선택으로 살아온 것은 아닐텐데.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까.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 흐르는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다고 자기개발서들은 하나같이 외치는데 그 개발서들은 누군가의 선택을 따르기로 결정한(혹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자발성의 성질은 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자발성을 사용하는 것은 선택의 폭이 없는 제도의 문제일텐데 말이다. 무엇인가 불편한 일을 솔선수범하는 것이 아니라 편한 방식으로 익숙한 일만 하려고 하는 보수적 사고에 나는 반발감을 느낀다. 서민이 보수가되면, 그저 내가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명령이 서민에게 내려지면. 그 사회는 정말 꽉 갇힌 채 답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정말 그대로 보답받을 것인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 복잡하게 타락한 곳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는가. 올바름에 대한 중심이 없이는,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갈증이 없이는. 결코 성공이란 현상은 일어날리 없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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