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야기

안겪어도 되는 일

misfortune4 2022. 8. 26. 08:51

출근하지 않았으면 안겪어도 될 일들

안씻고 담배쩐 앞남자의 코를 찌르는 냄새

아저씨들의 뱃살 사이에 낑겨서 가기

여자들의 각진 백에 몸 여기저기 찔리기

내 어깨에 누군가가 핸드폰을 올려놓고 낄낄대는걸 참는 일

말리지도 않은 젖은 머리를 두손으로 계속 쳐내며 옆사람에게 머리싸대기 날리는 미친년들을 참는 일

젊은 여자옆에만 꼭 와서 몸을 붙이는 늙은 병신새끼들

짧은 치마만 보면 눈돌아가는 할배새끼들

길막고 공사하면서 공지도 없는 노숙자공사인부새끼들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벗고 코푸는 오리궁뎅이 레깅스년

아무데서나 코파고 재치기하는 남자새끼들

나무있는 곳을 찾아가 한숨돌릴 때 담배피며 가래침뱉는 새끼들

아침부터 라면끓여먹으며 냄새풍기는 미친새끼들

더러운바닥 피해가며 하이힐로 걷는 노동

거칠고 투박한 인간들의 동선을 피해 도망다니는 일

나를 보호하는데 혈안이 되는 모든 일

 

 

출근하지 않았으면 경험했을 일들

눈이 떠졌는데도 몸을 일으키지 않아도 되는 자유

매트리스에서 뒹굴며 고양이들을 만지는 자유

눈이 떴는데도 일어나지 않자 냥냥펀치를 시전하는 고양이들을 놀리는 자유

단비와 단밤이의 젤리를 뺨으로 맞는 기분

귀에대고 울어대고 내 뺨을 핥아대는 단밤이의 고소한 냄새를 맡는 일

우어우어 울어대는 먼로를 한손에 들고 빙빙 돌리며 뽀뽀하는 일

토깽이처럼 도망만 다니는 니니를 쓰다듬는척하며 안아올려 부비부비할 때 새까매지는 니니의 커다란 눈동자를 한없이 보는 일

아이들의 밥을 차려주고도 현관문을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

씻고도 머리를 말리지 않아도 되는 일

씩고서도 옷을 갈아입지 않아도 되는 일

오늘 무엇을 입어야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일

철푸덕 주저앉아 멍때리며 아무생각이나 하며 낄낄댈 수 있는 일

맘 편에 모닝와인을 마시며 기분좋게 춤출 수 있는 일

스트레칭을 하며 고양이처럼 종일 굴러다닐 수 있는 일

깼는데 또 잘 수 있는 일

시도때도 없이 긴장하며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나에게 말을 시키며 온갖일에 신경쓰며 간섭하며 쿵쾅대며 문을 세게 여닫으며 신발소리를 크게 내며 경직되고 뻣뻣한 직장인간들의 존재감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일

먹고 싶을 때 먹고

굶고 싶을 때 굶을 수 있는 일

하루종일 아무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일

하루종일 아무표정도 짓지 않아도 되는 일

어떤 리액션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일

어떤 연락도 취하지도 받지도 않아도 되는 일

내가 아프거나 죽었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일

누가 아프거나 죽었어도 내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일

사회속에서 사람들과 살면서 해야하는 모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인생이 그렇게 나에게 많이 남은 것 같지 않아서

정말 그런 것 같아서

나는 병이 아닌 사고로 죽을 것 같아

나는 죄를 많이 지었으니까

조금남았다면 남은 인생은,

좋은것만 느끼고

부정적인 것들은 최대한 멀리하고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기 위해 마련된 조건이란 전혀 존재하지가 않는다

옆사람이 움직이거나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존재감을 안느끼게 했으면 좋겠다

그대로 뒤져도 아무도 모르게 다 살았으면 좋겠다

 

살아있는 것들 중

인간 빼고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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