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야기

장미빛 인생

misfortune4 2015. 11. 8. 22:13






장미빛 인생 / 기형도


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온다

모자를 벗자 그의 남루한 외투처럼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그는 건강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

단 한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그럴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본 적이 있었을까

사내는 말이 없다, 그는 함부로 자신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한 곳을 향해 그 어떤 체험들을 착취하고 있다

숱한 사건들의 매듭을 풀기 위해, 얼마나 가혹한 많은 방문객들을

저 시선을 노려보았을까, 여러 차례로 거듭되는

의혹과 유혹을 맛본 자의 그것처럼

그 어떤 육체의 무질서도 단호히 거부하는 어깨

어찌 보면 그 어떤 질투심에 스스로 감격하는 듯한 입술

분명 우두머리를 꿈꾸었을, 머리카락에 가리워진 귀

그러나 누가 감히 저 사내의 책임을 뒤집어쓰랴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다,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그는 두툼한 외투 속에서 무엇인가 끄집어낸다

고독의 완강한 저항을 뿌리치며, 어떤 대결도 각오하겠다는 듯이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얼굴 위를 걸어다니는 저 표정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 위를 파내기 시작한다

건장한 덩치를 굽힌 채, 느릿느릿

그러나 허겁지겁, 스스로의 명령에 힘을 넣어가며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흔해빠진 독서 / 기형도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 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달라고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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